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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에 부치는 편지>: 태형(가명) 아저씨에게

작성자 : 희년함께 (218.236.131.***)

조회 : 873 / 등록일 : 21-11-17 11:34

<쪽방촌에 부치는 편지>: 태(가명) 아저씨에게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피아노입니다.

쌀쌀해지는 밤이면 유난히 아저씨가 많이 떠오릅니다. 난 아저씨만 생각하면 이유를 모르게 울컥해져요. 근데 아저씨도 이 청년의 또렷한 눈망울만 보면 유독 그러시더라고요.

아저씨와의 추억을 곱씹으면 주로 서정적이에요. 하루는 술을 거나하게 잡수시고 공원 의자에서 버려진 곰인형에 기대 누워계시는 아저씨 옆에서 저는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들고 시린 손을 비벼가며 아저씨가 듣고 싶은 노래들을 연주했었는데, 아저씨는 그때 겨울아이라는 노래를 듣고 싶어했어요.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겨울에 태어난 사랑스런 당신은 눈처럼 맑은 나만의 당신

하지만 봄 여름과 가을 겨울 언제나 맑고 깨끗해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전 그때 노래를 부르던 아저씨의 붉어진 눈시울을 봤어요. 혼탁한 와중에도 맑고 깨끗하게 축하받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저에게는 그런 느낌이 전달된 순간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이미 망가졌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아저씨는 지금도 참 맑고 깨끗하십니다. 그래도 조금 젊다고 조금이라도 더 맑은 녀석이 그렇게 말하니 잠시 설득되셨던 걸까요? 아니면 저를 볼 때마다 반짝였던 당신의 지난날을 떠올리셔서일까요? 난 그런 아저씨 옆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별말을 하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있기만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간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작은 쪽방 공간에서, 현재의 괴로움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아저씨에게 어린 이방인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저 아저씨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이 좋고 바라봄이 좋지만, 찰나의 좋음은 그것이 평생이 되면 그렇게 눈물과 회한으로 바뀌는 것인가요.

 

난 아저씨의 아픔을 다 알지 못합니다. 듣고 들어도 다 알 수 없을 겁니다. 주변 이웃들이 다 아저씨만 보면 이 자식은 술을 하도 마셔대서 올해까지 절대 못 버틸 거라고 그랬다면서요. 하루하루를 술로 지샌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아무리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아저씨는 내게 말했습니다. 야 다들 내가 곧 죽는다고 했지만, 나 올해도 살아있다. 한껏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뉘앙스가 사무칩니다. 잘했어요, 내년에도 어떻게든 살아야죠. 제게 얼굴 계속 보여주셔야죠. 고통스런 삶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살아내라는 무책임한 요구에 내가 아저씨를 보고 싶다는 이기심 한 스푼을 더합니다. 미안합니다. 난 그토록 무지합니다. 그러나 아저씨, 아저씨 덕분에 저에게는 편지로 쪽방촌에서의 단상을 하나하나 기록해두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나라는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강렬한 존재예요. 무식한 나를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주시길 바라요.

 

 

피아노 올림

 

 

 

탁장한. <누가 빈곤의 도시를 만드는가>의 저자. 쪽방촌 사람들을 곁에서 매일 생각하고 또 존경하는 사람이다. 쪽방촌 내 공원에서 주일마다 피아노를 연주해, ‘피아노 청년으로 기억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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