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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이란 무엇인가8] 창조 신앙, 참인간다움과 상식의 토대, 전성민 교수

작성자 : 관리자 (175.211.189.***)

조회 : 2,310 / 등록일 : 19-03-01 16:59

[희년이란 무엇인가? - 희년함께 연재 기획 인터뷰8]

 

 

 

  창조 신앙, 참인간다움과 상식의 토대

 

 

 

전성민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교수

 

희년이란 무엇인가 여덟 번째 인터뷰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이신 전성민 교수님입니다. 전성민 교수님의 구약윤리와 창조 신앙에 관한 오랜 고민이 교회와 세상이 더욱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자기소개 및 하고 계신 사역 소개 부탁드립니다.

 

전성민(이하 전) / 전성민이구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2005년 2학기부터 구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연구위원으로 강의하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과 상황> 편집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학사 전공이 수학인데 신학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청년대학부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성경 공부 조장도 맡게 되었구요. 그래서 나름대로 신학 서적이나 경건 서적들을 읽으면서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책도 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신학 공부를 언젠가는 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밴쿠버에 가게 될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란 학교에 제임스 패커(J. I. Packer) 교수님이 계신걸 알고 좋은 학교인가보다 하면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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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수학 공부를 하다 보니까 수학이 대체로 재미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름답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학문이긴 한데 사람 사는 데에는 당장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공부의 흥미를 급격하게 잃었어요(웃음). 그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한국 사회의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불평등이나 불의함에 관한 문제의식들을 갖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뭘 하면 좋을지 학교 선배와 얘기를 했더니 세금 관련한 공부를 해 보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그때 세금 공부를 했으면 지금 희년함께에서 함께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어요(웃음). 그래서 경제학 편입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죠.

 

그런 와중에 좀 전에 이야기했듯이 밴쿠버에 갈 일이 생겼는데 거기서 제임스 패커가 있는 학교가 있는 걸 알게 되면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리젠트 칼리지는 굉장히 쉽게 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거든요. 한국의 경우에는 목회에 소명을 받았는지 중요하게 물어보는데 리젠트 칼리지는 쉽게 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어요. 모든 교인들이 살다 보면 신학적인 고민들이 있고 질문들이 있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편하게 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어요. 1년 공부하다가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있는 거고.

 

물론 거기에는 목회 준비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자기 직장과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에 관한 신학적인 통찰을 얻기 위해서 1~2년 공부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학 공부를 조금은 편하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리젠트 칼리지는 꼭 목회를 하기 위한 신학이 아니라 평신도가 신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신학교를 표방하나 봅니다. 한국에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그런 경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외국에서는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모든 삶의 영역을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소양을 쌓는 것이 중요하지요.

 

제가 사랑의교회 대학부 생활을 하면서 성경 공부를 인도했는데 그러려면 신학 경건 서적을 읽고 신학적인 소양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잖아요. 사랑의교회는 평신도 제자 훈련을 강조하는 교회라서 누구나 성경 공부를 인도할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훈련이나 준비들이 필요하지요. 이런 환경에 있다 보니 신학적 소양이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대학 생활부터 자연스럽게 생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리젠트 칼리지 경험을 통해 그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한국에서 실현해 보고자 같은 마음을 가진 교수님들과 함께 시작한 것이 느헤미야입니다. 실제로 느헤미야에서 공부하고 계신 분들은 참 다양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만족하고, 심지어 행복해하시기도 합니다.

 

신학 중에서도 구약윤리를 전공하게 되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89학번인데 80년대에는 대학 사회가 한국 사회의 혼란이나 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복음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책은 의미 있는 대답들이나 방향들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되면 구약윤리 공부를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사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책을 보면 경제 윤리 부문도 있으니까 경제학에 관심이 있던 저로서는 더 흥미가 생긴 거죠.

 

복음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갖고 공부해 볼 수 있는 영역이 구약윤리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로 많은 강의도 하셨는데 인터뷰를 읽는 한국교회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선교>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제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첫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택', '윤리', '선교'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규명한 것이에요. 선택과 선교의 관계에 있어서 저희들은 보통 선택을 받는 것에 대해 '내가 선택되면 다른 사람들은 배제되어지는 걸'로 생각을 하죠. 하지만 그렇지 않고 선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도구적 선택이라는 것, 즉 선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셨다는 구원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선교적인 의미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밝힌 점이에요.

 

'선택'과 '선교' 사이에 '윤리'를 강조한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윤리'라고 하면 '복음'에 대조되고 반대되는 덕목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윤리를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표현하면 '삶의 순종'이거든요.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선택과 선교를 이어 주는 중요한 고리라는 것입니다.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경적 윤리 없이는 성경적 선교가 없다"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작은 의미에서의 선교인 '전도'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고 보여 줌에 있어서 말보다도 교인들의, 하나님 백성의 삶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특별히 이 관계에 대해 창세기 19장 18절 주해를 통해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한 절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윤리를 선택과 선교의 고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일반적으로 선교라는 의미를 지역적인 팽창이나 수적인 증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그게 아니라 선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열방이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얘길 하거든요. 거기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부분에 그런 참여의 무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언급합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교에서 아주 독특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선교의 영역으로 강조하는 것은 선교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걸 명확히 보여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사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흥미로운 도전들을 던져 줍니다. 왜냐하면 지역적인 팽창이나 수적인 증가가 아닌 '피조 세계를 돌봄'이라는 것을 선교의 무대로 생각하게 되면 그 무대에서는 기독교적인 전통이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도 만나게 되거든요. 거기서 우리가 온 우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그들과 어떻게 관계하고 같이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라이트가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지만 살짝 힌트는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면서 다원주의적 사회 내에서 우리들이 부딪치게 되는 실제적인 고민들을 던져 주지요. <하나님의 선교>를 읽고 그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살다 보면 다원화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처한 환경, 맥락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가 한국교회에 주는 함의가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거부감 없이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이 주는 선입견을 좀 벗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교'라는 표현 자체가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고 해서 소위 말하는 WCC 진영에서 나온 선교론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이냐' 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에 관해서 무시하는 개념' 등으로 잘못된 오해를 가져올 수 있어요. 그래서 우선은 말 자체에서 오는 선입견을 일단 버려야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라이트는 WCC 진영의 '하나님의 선교'가 전도를 등한시하게 하는 등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나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주는 통찰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불신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숙한 존재로 자라나고 이 세상에 공평과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깃드는 것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기존의 하나님 선교 신학이 복음주의자들에게 도전을 준 아주 좋은 개념이라고 라이트는 얘기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에 관한 부담을 좀 떨구고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의미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선교'가 지역적 팽창이나 양적 성장이 아니라 참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참하나님을 알게 되면 사실 우리 삶에 굉장히 도전이 되고 버려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무척 부담스럽죠.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이라는 허울로 나의 야망과 욕망을 포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쩌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더 본질에 집중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한국교회에 얼마나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고요. 그런데 받아들이려면 한국교회의 습성이나 분위기상 깨뜨리거나 포기해야 하거나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들이 적진 않겠죠.

 

구약윤리학계에서 희년에 대한 입장과 평가는 어떤지 개략적으로 나누어 주신다면.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일단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희년'에 관해서 초기부터 계속 집중해 왔거든요. 그래서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에서도 그렇고 특별히 경제학이라든지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희년을 항상 언급을 했고 여러 책들에 희년에 관해서 집중해서 연구한 장들이 있어요.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에서는 한 장의 일부로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출애굽에 맞먹는 아주 중요한 모델로 제시를 하죠.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우리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를 따라야 한다면 하나님의 선교를 찾을 수 있는 그 모델이 있는데 하나는 '구속의 모델'로서 '출애굽'이고 하나는 '회복의 모델'로서 '희년'이라고 구약의 두 가지 중요한 모델로 출애굽과 희년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희년은 크리스토퍼 라이트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가 되지요. 그렇지만 학술적 입장에서 구약윤리를 보면 라이트의 입장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주 회의적인 입장도 있어요. 시릴 로드(Cyril S. Rodd)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구약시대에는 우리와 너무나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시대인데 그 시대에 주어졌던 율법이나 이야기들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겠느냐, 이건 불가능하다 내지 매우 힘들다고 봅니다.

 

그리고 희년은 어떤 면에서는 독특하지도 않다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왕들이 노예를 해방해 주는 일들이 있었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약의 관심도 구약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거든요.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왕들이 그런 관심들을 보였던 것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얘기를 하지요.

 

그런 관점에서는 희년이 구약윤리에서 뚜렷한 주제로 도드라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구약윤리를 다 펼쳐 놓고 보면 희년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이제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고 우리와 같은 전통에 서 있는 복음주의 입장으로 가게 되면, 특별히 라이트와 같은 사람이 희년을 중요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구약학계에서는 희년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은 역사적으로 회복이라는 주제가 중요한 곳이다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당장 해방 50년 후인, 1995년 전후로 통일 희년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희년에 관한 연구들이 한국 구약학계에서 꽤 많이 나왔었습니다. 희년의 주제가 회복과 자유인데 그게 필요한 상황이다 보니까 한국에서 희년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좀 들더라구요. 한국 구약학계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정의하시는 희년이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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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드러나야 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영역을 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 되심이 드러나야 되는데 그것을 요구하는 어떤 정신 혹은 규례가 희년이라는 생각이 들구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이 우리가 갖고 있는 땅, 자원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몸, 노동력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동체의 주인 되심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거류민으로 살아야 되는 거죠. 그것을 희년이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구약 본문에서 하나님과 백성과 땅이라는 3대 주제를 끌어내어 그 관계 속에서의 기본적 원리를 현대 윤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나 개인이 희년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나 개인이 오늘날 희년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희년 실천 방안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터뷰하셨던 분들이 구체적인 것들을 많이 얘기해 주셨던 것 같구요. 저는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요소가 하나 있다면, 희년은 개인의 자발성의 문제를 넘어서 시스템화·제도화가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까 시릴 로드 얘기를 할 때 희년에 빚을 면제해 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없었던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이스라엘에만 독특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얘기했잖아요.

 

그럼에도 희년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기성'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눔·돌봄·자선이라는 주제는 성경에서 희년 규례 말고도 굉장히 많이 있어요. 그런데 무엇이 희년 규례를 독특하게 만들고 구별해 주냐면 '주기성'이 있다는 것이거든요. '주기성'의 현대적 의미는 자기가 자기의 유익에 따라서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대 근동 사회의 나라에서 왕이 노예를 해방시키고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자기 권력이 흔들리고 자기가 새로 왕이 되어서 시혜를 베푸는 등 자기의 유익을 위한 목적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의 희년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50년이라는 시간이 되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와 관계없이 해야만 하는 시스템 혹은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 희년의 구체적인 적용에서의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구약에는 희년 외에도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에 관한 본문들이 많이 있거든요. 이러한 본문들과 희년의 차이점을 찾는다면 희년의 경우엔 제도화·시스템화가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희년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희년의 실천 주체가 국가인지 교회인지의 여부인데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신약의 담지자는 교회인데 이스라엘에게 주신 희년법을 국가에게 적용하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희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어떻게 교회를 넘어서 사회로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구약윤리에 있어서 방법론의 문제인데요. 라이트의 방법론을 우리가 따라가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을 향한 예표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패러다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하거든요. 그래서 만일에 라이트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큰 문제없이 세상에 적용할 수 있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어떤 면에서 신앙 공동체를 넘어서 일반 사회의 패러다임이고 그것이 패러다임적으로 세상에 적용된다고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게 어떤 면에서는 전제와 같은 방법론이에요. 그걸 받아들이면 그 문제의식이 해결이 되기는 하죠. 문제는 그 방법론이 얼마나 옳으냐가 되겠죠.

 

답이 딱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신학적 주제는 '창조'라는 주제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구약의 두 가지 큰 주제인 '창조'와 '구속'을 얼마나 잘 융합 내지 결합하느냐의 문제죠. 희년법을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어진 율법이라는 것이 구속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구속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맥락은 창조 세계 안에 있잖아요? 그러면 구속받은 공동체 바깥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냐? 그렇지 않잖아요.

 

창조라는 주제는 분명하게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주제이므로 일차적으로 어떤 신앙적인 법,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구속 공동체 바깥에도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거구요. 그럼 그게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이냐에 있어서는 라이트는 패러다임이라는 방법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구요.

 

제가 볼 때는 희년의 적용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창조라는 주제를 붙잡는다면 교회 바깥의 영역에도 하나님의 뜻이 암묵적으로라도 드러나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어떤 방식이냐가 문제가 되겠죠.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자연법이라는 주제예요. 자연법이라는 게 마치 자연과 계시를 이분화해서 자연법이면 굉장히 가톨릭적이고 계시를 무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통적으로 두 권의 책, 성경과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처럼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고백하면 창조라는 틀 안에서도 자연법이라는 게 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거든요.

 

자연법을 일반 은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네. 일반 은총이 될 수 있겠죠. 자연법이라 하면 결국은 사람들의 양심에 혹은 세상의 질서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도(道)이죠. 그렇게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창조 신앙의 고백은 구속받은 공동체 바깥의 영역에도 하나님 뜻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일단 펼쳐 놓는 것이 되죠. 어떤 방식으로 될지는 모르죠. 한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제시가 되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방식들은 여전히 추구하고 찾아야 할 문제이지 포기하거나 접어 둘 문제는 아닌 것이죠.

 

그리고 구약에 있는 율법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이상적인 것을 다 요구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구약의 율법은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고 당시 문화적인 한계 때문에라도 남녀의 어떤 신분 체제 차이라든지 종과 주인의 차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사람들의 한계 내에서 주어진 율법이거든요. 우리가 어떤 법을 만듦으로써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땅에 법제화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하나님도 안 하신 일을 시도하는 것이 되죠.

 

그렇지만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제하의 묵인'이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그 당시 사회의 한계 내에서 인내하고 묵인되어질 수 있는 것이 있지만, 그렇다고 다 내려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내려는 시도들이나 규례들이 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노예들의 권익을 존중해 주는 규례들은 당시의 주변 문화와 비교해 보면 존재한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어떤 신앙적인 법제를 세상에 적용한다고 했을 때 교회 공동체에 도전하는 정도의 이상적인 수준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려고 하니까 안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갖지만, 그것을 조금 낮춘다면 저는 의미 있는 변화들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희년함께에 해 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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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에 대한 성경 주해가 김회권, 신현우, 김근주 교수님들의 도움을 통해 더 정교해지는 것 같아서 감사하구요.

 

희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단체가 영국에 또 있어요. 쥬빌리센터라는 단체인데요. 이쪽이 갖고 있는 관심사는 굉장히 다양해요. 우리가 희년함께 생각하면 토지단일세라든지 말 그대로 헨리조지센터잖아요. 헨리 조지라는 경제학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그렇게 특화될 수도 있지만 쥬빌리센터라는 단체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을 보면 거의 삶의 모든 영역을 다 다루고 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삶의 주인 되심이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영역을 조금 더 다양화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구약윤리를 통해 오늘의 사회와 교회를 보면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 한국교회에 해 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구약윤리 혹은 구약적 입장에서 강조 내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구약에는 제사장이라는 직급이 있잖아요. 그런데 제사장이 오늘날 흔히 전임 사역자로 대응되는 견해들이 은연중에 많은 것 같은데 그건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전임 사역자가 레위지파나 제사장이 아닙니다. 신약에 보면 분명하게 모든 교인들을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윤리나 구약을 이야기할 때 구속적인 입장을 사람들이 많이 강조를 합니다. 구약 역사도 구속사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은 '구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란 주제가 있거든요. 저는 그것을 같이 생각해야 된다고 봅니다. 창조란 주제를 생각할수록 신앙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게 인간이 되는, 참인간다움이 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인권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인권은 인본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인, 창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왕이나 귀족뿐만 아니라,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봄에 있어서 조금 더 자연스럽고 더 큰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창조'라는 주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고 더욱 상식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년 세대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말씀드리기에는 지금 청년 세대들이 겪는 어려움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데요. 다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용기를 내시면 좋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필요할 때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연애의 문제든, 직장을 결정하는 문제든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필요한 순간에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제목 나누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섬기는 곳이 교회 외에 두 곳이 있습니다. 먼저 학교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세워지고 학위 논문 출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일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토대가 잘 다져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강의를 할 기회가 있는데 강의를 할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진정한 기쁨을 더 깊이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201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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