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기획연재
이전 목록 다음

[희년이란 무엇인가3]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목사 인터뷰

작성자 : 관리자 (175.211.189.***)

조회 : 2,249 / 등록일 : 19-02-27 16:16

[희년이란 무엇인가? - 희년함께 연재 기획 인터뷰3]

 

 

 

희년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뤄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목사 인터뷰

 

 

 

이해학 / 희년함께 공동대표

 

희년이란 무엇인가 세 번째 인터뷰는 희년함께 공동대표이신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님입니다. 이해학 목사님은 1970년대 빈민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생명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의 현장에 늘 함께 하셨던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남주민교회는 1970-80년대의 암혹한 시절,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고 1980년 신용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 지역사회 속에서의 섬김까지 바람직한 교회 상에 있어 지금도 귀감이 되는 교회입니다.

 

암혹한 시대 속에서 빈민선교, 민중선교를 담당하시면서 교회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온 성남주민교회와 이해학 목사님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 우리 시대 가운데 교회와 기독시민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1960년 4·19 혁명부터 2010년 한일강제합병 100년까지의 현대사 속으로의 여행을 위해 쉼호흡을 한번 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에 대한 소개와 사역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고요. 고등학교 때 4·19혁명에 참여하다가 개머리판에 맞아서 이마가 깨졌고요. 그리고 서울에 와서는 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에 참여를 하면서 벌써 50년 가까이 길바닥에서 사는 것과 같은 생을 살았습니다.

 

111179d01427cb189817ba59523ed77b_1551251
 

한신대에 다닐 때에 1971년 10월 위수령1) 파동으로 강제제명을 당해서 한신대에서 제적됐어요. 그것 때문에 수도권에 있는 빈민들을 조직하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이하 수도권 선교위)라고 하는 단체에 훈련실무자로 갔어요. 수도권 선교위에서 저를 경기도 성남시, 그때는 광주단지였는데 거기로 파송을 했어요.

 

제가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에 늘 감시당하고 쫓기는 상황이라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어요. 큰 교회에 가서 내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역할을 좀 하고 싶은데 나를 실무자로 써 달라니까 안 써주는 거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아이들하고 놀았어요. 아이들하고 딱지도 치고 다마치기도 하고 탁구도 치고 하면서 놀다 보니까 어린이 자치회가 조직됐어요. 7-80명 어린이들이 스스로 자치회를 하고 폐품 수집을 해서 그걸 팔아서 책을 사고, 스스로 만든 마을도서관을 만들어서 우리가 공동운영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를 소개하고 언니오빠를 소개하면서 교회가 시작됐어요. 그해가 1973년이에요.

 

그런데 1973년에 남산부활절 연합예배사건2)으로 박형준 목사님 등이 구속이 됐어요. 그래서 교회가 개척된 첫 해에 제가 했던 일이 성도들을 돌보고 빈민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박형준 목사님 석방운동하려고 쫓아다닌 일이에요. 그러다 그 해 9월에 제가 남산(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몇 일동안 발가벗겨진 채로 갖은 고문을 당했어요.

 

또 그 해 12월에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유신헌법 철폐와 유신헌법 개정 청원소원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새벽에 딱 떴어요. 긴급조치3) 1호가 막 터졌을 때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서 스탭 미팅을 하면서 우리가 빈민들을 조직해서 그들을 의식화해서 그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하고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할 수 있는 임자들로 육성시킨다는 목표를 중지하기로 하고 목표를 독재투쟁, 박정희 타도로 바꾸었어요.

 

그래서 긴급조치 1호를 우리가 치고 들어가기로 스탭미팅에서 결정하고 그 임무를 저한테 맡겼어요. 그래서 청계천 빈민촌에서 목회하고 있던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에게 독재투쟁을 하자고 제안했고 김진홍 목사가 인명진 목사를 끌어들이고 인명진 목사가 감리교 김경락 목사를 끌어들였어요. 그래서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감리교가 서로 연대해서 2월 18일에 종로 5가에 있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총무 방에서 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기자회견을 해요. 그리고 저는 서명을 받으러 다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15년 징역을 받았어요.

 

그런데 74년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해요. 그리고 미국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의 인권탄압을 풀라는 압력을 하면서 육영수 여사가 죽은 이후로 국민들이 화해를 했다는 명분으로 우리를 형집행정지로 석방을 했어요. 저는 감옥에서 1년 조금 더 살다가 75년 2월 15일에 출소했어요.

 

감옥에서 나와서 1년간 야간학교도 하고 실업자 상담소도 만들고 노동자교육도 시키는 등 의 일들을 했어요.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76년 3․1절에 문제가 생겨요. 문익환 목사가 1976년 3․1절에 우리교회에 강의를 하러 와서 성명서 하나를 저에게 줘요. 그게 민주구국선언4)문이에요. 그것을 명동성당에 가서 읽고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함석헌 등이 거기에 연루되어서 구속이 됐어요. 그리고 그분들을 국가 전복예비음모죄로 사형을 처할 수 있다고 발표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걸 한부 가지고 있는데 그 내용에 국가전복이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내용을 우리 교회 청년회장하고 같이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들통이 나서 그 사람은 체포되고 저는 6개월 뒤에 자수해서 3년형을 받았어요. 3년형 받고 형집행정지로 2년 6개월 살고 나왔어요.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죽고 그 이듬해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어요. 80년대 성남지역에서는 부문운동, 지역 시민사회연대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기반들이 87년 6월 항쟁 시기에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성남지역본부’로 조직을 갖추고 제가 상임대표를 맡았어요.

 

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우리 운동이 통일에 대한 문제로 시각이 돌려졌어요. 그래서 저는 민간통일운동 지도부에서 일을 해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아서 저희가 1990년에 범민족대회를 한다고 발표를 하고 노태우대통령이 허락을 해요. 그런데 정부의 간섭으로 남북협상이 결국은 결렬되면서 북한은 판문점에서, 남한은 연세대학교에서 범민족대회를 했어요. 그리고 저는 1990년 12월에 베를린에 가서 북쪽 대표하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 관한 회담을 하고 돌아와서 구속이 되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징역을 살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민간통일운동 진영에서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진영의 통일운동에 관여해왔어요. 가능하면 두 개의 축을 일원화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서로 교류시키는 역할도 해보고 또 서로 가지고 있는 아집이나 독선적인 것, 또 독점하려고 하는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도 좀 해보고 그렇게 하면서 지내왔죠.

 

그리고 통일운동 다음에는 일본 과거사 청산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인 2010년에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받고 가능하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저런 활동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왔고 지역운동으로는 신용협동조합을 1980년에 시작했고 같은 해에 지역 YMCA를 시작했고 1990년에 생활협동조합을 시작했고 그리고 2000년에는 자활을 비롯한 복지운동을 하며 더불어 사는 지역을 만들기 위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에 궁지에 빠진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만들었고요. 이 일이 많아져서 구로로 일부를 옮겼고 안산, 평택, 남양주 등에 센터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공간이 없어서 제 서재를 사무실로 내놨어요. 그리고 거기서 같이 일하면서 훈련받았던 김해성 목사가 지금은 그 일을 전담하고 세계적인 활동으로 키워가고 있어요. 저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시네요. 빈민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 다양한 인권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2012년 마틴 루터 킹 데이에 퍼레이드 리더인 인터내셔널 그랜드 마샬(International Grand Marshal)로 초청받으셨는데 다녀오신 얘기 부탁드립니다.

 

미국에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King Jr.)을 기념하며 미국 전역에서 행진을 해요. 그 행진 중에 LA 행진이 제일 커요. 많이 모일때는 100만명 씩 모이는 중요한 행진인데 그 행진을 주도하는 사람을 인터내셔널 그랜드 마샬이라고 해요. 마틴 루터 킹의 정신으로 살아간 사람을 상징적으로 세우는 거에요.

 

저한테 처음에 의탁이 왔을 때 전 거절했어요. 우리나라에는 나보다 더 훌륭하고 헌신적인 인권운동가가 많이 있기 때문에 나보고 다른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면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쪽의 얘기가 금년에는 이해학목사가 가장 적합하다는 거에요. 빈민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외국인노동자,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을 위해 했던 일들의 무게가 적지 않으므로 2012년 인터내셔널 그랜드 마샬에 적합하다고 해서 제가 갔어요.

 

111179d01427cb189817ba59523ed77b_1551251 

 마틴 루터 킹 데이에 행진하는 이해학 목사.

 

가서 보니까 굉장한 행사였어요. 그래서 이건 나 혼자 갈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 일본 피해자들을 위해 일한 사람, 민주화운동을 위해 일한 사람들과 우리 교회 교인들이 다 같이 가서 보고 행진을 해야 더 신나는 축제가 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온 것이 아주 쓸쓸하고 아쉬웠어요.

 

마틴 루터 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자기들의 존경하는 영웅이고 자기들의 삶의 질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었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마틴 루터 킹 이름만 들어도 흥분해요. 제가 마틴 루터 킹 브라보, 프리덤, 리버티라고 할 때 얼마나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눈빛을 보면 그 사람들 속에서 마틴 루터 킹은 지금도 살아있어요. 앞으로도 세계의 인종차별과 계급적 차별들을 철폐해나가는데 마틴 루터 킹의 정신은 계속 살아있고 또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행사를 잘 마치고 왔습니다.

 

진보적인 역사의식과 신앙을 갖게 되신 계기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굉장히 보수적인 신앙에서 출발했어요. 하나님의 성회 전에 오순절이라고 하는 성령운동하는 교회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 신학교에 갔었고 그것이 전부인 줄로 알았고 최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상계를 읽으면서 함석헌 선생을 만났어요. 함석헌 선생에게서 역사신학을 배워요. 그리고 장준하 선생한테서 민족주의를 배워요. 그러면서 남북관계와 주변정치에 관한 흐름들을 이해하게 됐어요.

 

그리고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니까 다르더라고. 그래서 순복음신학교 3년을 하고 졸업장을 거절하고 나와서 서울시립도서관에 가서 김재준 박사의 『하늘과 땅의 해후』라는 책을 읽다가 거기서 엉엉 울고 뒹굴었어요. 그러니까 아주 좁게 사람을 감시하고 잘하는 사람한테 축복이라는 떡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인간을 긍정적으로 품어가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 용서와 화해를 더 좋아하시고 사랑으로 정의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관한 그 수필집을 읽으면서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한거에요. 제가 지금까지 믿고 기도했던 하나님과 전혀 다른. 김재준박사의 하늘과 땅의 해후를 읽으면서 쓰러졌던 그 사건 이후에 제가 한신대로 가요.

 

그리고 함석헌 선생을 통해서 배운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서 봐야 한다는 거에요. 역사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미신이 되고 그런 신앙은 우상화에 빠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병들었건 건강하건 우리 사회를 떠나 살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와 민족적 과제인 남북관계를 떠나서 우리 삶을 규정할 수가 없어요.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현장에서 내가 어떻게 지금의 사건을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하느냐, 이게 신앙이지 다른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신앙적 삶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다보니까 하다 보면 앞장서 있고, 하다보면 앞으로 밀려나가고 하다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빈민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하실 때 가장 인상 깊은 사건 중 나누고 싶은 사건들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빈민운동이건, 민주화운동이건, 생명평화운동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서게 해줘야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제 사역의 실패와 실수를 많이 한 것은 너무 나 중심으로 생각했던 거에요. 내 것을 뭔가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뭔가 깨우쳐 줘야 한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실수에 대해 저는 크게 반성을 해요.

 

예를 들어서 산부인과에 애를 낳으러 온 산모가 있으면 의사는 그 산모가 애를 낳을 때 힘을 주라고 옆에서 도울 수도 있고 힘이 없으면 주사를 놔줄 수도 있고 그런 보조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산모가 애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내려오라고 하고 의사가 올라가서 낑낑거리며 힘을 쓰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를 비롯한 한국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 정말 내 것을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주고 그것을 인정해주고 정당화시켜주고 그리고 그 것들이 잘 커가고 어우러져가도록 돕는 그런 섬김과 사역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빈민운동을 하면서 너무 어려웠어요. 형사들은 따라다니지, 통반장들은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주민들이 저한테 접근을 못하도록 하지. 이런 상황 속에서 빈민운동을 그만두고 정치투쟁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정치투쟁을 하다가 구속이 되니까 자연히 이름이 나고, 풀려나면서 영웅시되는 상황 속에서 약간의 흥분의 열매를 얻고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우리의 타락이었어요

 

아무리 시대가 어려워도 빈민들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이 서로 뭉쳐서 살게 하는데 집중해야 했어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해석을 스스로 하게 하고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궁리를 놓치지 않고 포기하지 말고 했어야 했어요.

 

성서를 다시 읽으면서 정치적 독재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빙자해서 우리가 정말 했어야 할 그 일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후회를 했어요. 그것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저는 제 생애의 큰 과오라고 생각합니다.

 

민중 또는 대중이 스스로 말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변화에 대한 말씀은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희년함께도 지금까지 토지보유세 강화와 같은 제도적 개혁운동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앞으로는 철거민 등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과 연대하면서 그 사람들의 문제도 함께 풀어 가려는 생각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잘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정치적 과제나 이런 것에 전혀 참여를 하지 않으면 폐쇄집단이 되어 버려요.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놓쳐버리면 자기들끼리의 고집스러운 바리새파 사람들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약간은 시대적 흐름에 관계를 하면서 본질문제를 놓치지 않는 자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111179d01427cb189817ba59523ed77b_1551251 

▲ International Grand Marshal로 초청받은 이해학 목사.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희년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희년은 다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제 자리에 돌려놓는 거에요. 사람들이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원칙이 파괴되고 소유의 균형이 깨집니다. 하지만 그 상태를 그대로 두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50년째에는 다시 되돌려 준다는 것이 희년의 정신이란 말이에요. 이것은 혁명이에요. 이건 제도적으로 50년마다 혁명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쨌든 성서의 정신은 거기에서 출발한다는 거에요. 그걸 해야 한다는 거에요.

 

제가 본 희년은 이사야 65장에 나오는 것 같이 사자가 양과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을 수 있는 세계에요.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압제하거나 약한 것이 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의 특색을 인정하고 역할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지원하며 보살피면서 상생관계를 이루는 것, 이것이 제가 보는 희년이에요. 레위기에 있는 희년정신이 바로 예언자들이 구가하는 희년과 같아요. 예수의 나사렛 메시아선언과 예수의 제자들이 만든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고, 바로 그것이 희년의 완성이다라고 저는 봅니다.

 

그것은 꿈만 꾸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뤄질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당위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희년운동에 제가 관여하고 배워간다는 것을 저는 굉장히 기쁘게 생각해요.

 

하나 더 얘기하자면, 희년은 단순한 사회복지가 아니고 사회정의가 이뤄지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사회정의가 시스템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희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980년대부터 신협과 생협 등 협동조합운동을 했거든요. 협동조합은 희년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협동조합은 이익공동체에요. 내 이익을 위해서 참여하는 거에요. 하지만 희년은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해요. 너를 위해서 나를 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희년적 관계에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너무 잘 얘기했다고 봐요. 난 요한복음 10장을 참 좋아해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생명을 주러 왔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러 왔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걸 이루기 위해서 뭘 하냐면 양의 음성을 들어요. 아픈 소리, 힘든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이름을 불러줍니다. 다시 말해서 현 상태를 서로 알아주고 존엄성을 인정해주는 거에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존엄성을 서로 인정해주는 상태, 그 상태에서 예수님은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거에요. 서로 알고 신뢰하고 서로 좋아하고 그런 상태에서 목숨을 줄 수 있는 관계, 그러한 사회, 그게 저는 희년을 사는 삶의 자세라고 봐요.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그렇게 사셨단 말이죠. 그럼 우리도 그렇게 살기만 하면 희년은 올 수 있는 건데 우리는 너무 교활하고 계산적이에요. 우리는 더 단순해져야 하고 더 정직해져야 해요.

 

성남주민교회는 태평동락커뮤니티로 새롭게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평동락커뮤니티를 통해 실천하려고 하는 희년적 실천들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신앙은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의심했는데 일본의 야마기시나 미국의 레바 플레이스나 아미쉬나 특히 부르더호프에 가서 보면서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같이 살아야 산상수훈의 삶을 살 수 있지 각자 개인이 흩어져서 살 때에는 그런 삶을 살기가 어려워요.

 

사회에서 퍼져서 소금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텃밭, 중심에서 그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원하고 계속해서 파송하고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생명공동체를 지향을 하죠. 빈민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협동조합운동을 넘어서 생명공동체운동을 해야한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제가 은퇴합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생명공동체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국의 부르더호프같은 공동체를 주민교회를 통해서 하는 것은 어려운 얘기같아요. 그렇게 욕심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구성원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야 하고요. 무엇보다도 자기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가기에는 아직까지는 좀 힘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시작한 것이 뭐냐면 자기 소유를 가지고 건물에 들어와서 같이 살아보자. 건물에 들어와서 같이 살면서 공동으로 식사를 하고 공동으로 육아도 해보고 공동으로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경험해 보는 겁니다. 전체를 내려놓고 포기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런 공동체로 갈 수 있는 디딤돌 징검다리 한번 건너보자는 것이 태평동락 커뮤니티입니다.

 

이건 실험이고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준비가 좀 되었어야 하는데 없는 가운데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참여하는 분들에게 흡족한 것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쨌건 새로운 실험입니다. 도시권에서 생명공동체로 가는 징검다리로서 준공동체생활을 한번 시도해보는 것이고 이건 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교회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저는 뒤에서 바라보면서 있습니다.

 

태평동락커뮤니티는 종교공동체인가요?

 

일단 우리 교인들 중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우선 들어가고요. 거기 있는 방들이 대형 방이 아니고 소형 방들입니다. 그러니까 전세를 사는 사람들은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니까 자주 이사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 염려에서 풀려나서 내 집으로 소유하면서 살 수 있는 방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대형가족은 안되고 단촐하게 부부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는 그런 방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고 공동문화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중심은 아니고요. 지역사회에 이런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고 또 이런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같이 어울려서 문화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시도입니다.

 

토지가치공유의 공동체적 실천방안은 무엇일까 살펴보면서 공동체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을 알게 되었습니다. 헨리조지의 토지가치공유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민권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함께 미국 남부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농부들의 어려움을 돕는 과정에서 적용되었던 방식이 공동체토지신탁인데요. 땅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토지는 임대를 하고 건물은 분양하는 방식인데 현재 미국에 240여개의 공동체토지신탁이 있다고 합니다. 태평동락 커뮤니티 같은 경우도 공동체가 토지가치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한다면 부동산 문제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 울림이 되지 않을까요?

 

지난 번에 서울시 자문위원장인 김수현 박사가 태평동락 커뮤니티에 와서 강의를 했어요. 앞으로의 부동산의 방향은 공공성으로 가야 한다라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 모습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그리고 서울에 어떤 교회가 땅을 내놓고 주변에 있는 빈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는다면 서울시가 적극 보조하겠다며 그런 교회를 소개해달라고 나한테 주문까지 했어요. 그래서 제가 KNCC에다 그 얘기를 전하고 땅을 내놓을 수 있는 교회를 찾아달라는 얘기를 했어요.

 

서울에 있는 빈민들을 위해 교회가 땅을 기증하고 서울시가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하나의 개교회로써는 부담스러울 수 있을텐데 교회연합방식으로 해서 기금마련이나 땅을 마련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교회목사들이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개교회가 어떻게 하면 개교회를 폭발적으로 키워갈 것인가, 대형교회를 만들 것인가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 세대가 더 지나가서 우리의 희년정신에 동감하는 젊은 교역자들이 나왔을 때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봐요.

 

성남주민교회는 희년적 실천을 많이 해오셨는데 교회나 개인이 희년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협이나 생협의 자립기반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자립의 단계를 넘어 어떻게 하면 더불어 나누는 단계로 갈지 고심을 하고 있어요. 신협에서 복지관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면서 운영을 해본다든지 하면서 이제는 이웃과 더불어 같이 사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그라민 은행 같은 운동 등을 할 수 있어야죠.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전에 대천덕 신부님도 교회에서 나오는 많은 헌금들을 일반 은행에 넣지 말고 교회 연합 방식으로 은행을 만들어서 그라민 뱅크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소액대출을 해주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주민교회 신협도 그런 구상을 하고 계신건가요?

 

이해학 : 지금 당장은 시도를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데 지원을 하고 있죠. 의료생협에 재정을 지원해서 의료생협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협도 제도화된 틀을 좀 더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신협에서 일하는 임원들의 고민이 깊어져야 하는 등의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신협 같은 경우도 주민교회가 주체인가요?

 

주민교회가 시작을 했는데 지금은 지역신협으로 나갔기 때문에 주민교회가 마음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주민교회가 성남지역의 마중물 역할을 감당해온 것 같습니다. 희년함께에 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가까이에서 보니까 희년함께에 관여하는 분들이 정말 정직하게 연구에 몰두하고 정직하게 자기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참 감동하고 배워가고 있어요. 자주 참석은 못하지만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고요.

 

희년함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의 문제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 말은 희년함께만큼 진보적인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진보의 자리가 창조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돈 없어서 힘들고 숫자 많지 않아서 외롭고 반복되는 것의 지루함도 있겠지만 그 자리 잘 지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가 자기에 도취되어 있는 것, 이건 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한국교회가 살려면 자기를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목사들도 더 많은 사례비를 받으려고 할 게 아니라 아직도 생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농촌 교역자들을 위해서 자기 것을 잘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거지 나사로를 쳐다보지 않는 부자의 한숨과 탄식에 동참하게 될 겁니다.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 한방울 찍어서 내 혀에다 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부자의 갈증과 탄식 속에 동참하지 않으려면 지금 정말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외롭게 본질적인 문제를 잡아가려고 하는 흐름들에 지원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무슨 몇 백억짜리 거대한 병원을 만들고 사업을 하는 이런 과시적인 사업이 아니라 세상의 질병을 고치는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곳에 교회가 나누어야 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교회가 구원받는 길입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더 겸허해지고 더 정직하게 본질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목사들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삽니다.

 

현대사를 훌륭하게 잘 감당해주셨는데 오늘의 사회를 보시면서 아쉬운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70년대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은 어떻게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가지고 싸웠는데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한국사회가 남북문제를 보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이 준 시대적 사명입니다.

 

한국의 DMZ라는 것은 우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용틀임을 하다가 만나 서로 휴전한 선이 DMZ선이거든요. 이것은 우리 한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남북한이 이 리트머스 시험지를 잘 풀면 세계평화의 진원지가 되고 이것을 잘 풀지 못하면 세계불화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하고 목표는 남과 북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모든 정치적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북쪽에는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고 남쪽에는 배가 터져서 죽어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정말 미친 짓일 뿐만 아니라 이것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 하늘의 징벌을 받습니다.

 

정치인들과 학자들도 자기 중심적 논리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남북문제라고 하는 틀 속에서 남북을 함께 살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북한을 공동운명체로 보는 그런 시각에서 경제론도 나오고 여러 가지 개발론도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북한동포가 굶어죽어 가는 것을 전혀 외면하고 자기 소유의 극대화를 향해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지금은 가는 길을 멈추고 좀 더 성찰하는 그런 정치인들, 경제인들, 종교인들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후배들에게 당부해주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년 때가 중요한 것 같아요. 청년 때의 시각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과 역사적인 사건이나 정치적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훈련을 청년 시절에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한 훈련이 그의 인생에 푯대를 만드는데 중요한 관점이 된다고 봅니다.

 

권정생 선생이 밭한뙈기라는 시를 썼어요.

 

밭 한 뙈기/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밭 한 뙈기 그것은 우리 모두의 것인데 그런 것들을 소유로 삼는 인간들은 참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2012년은 마야족의 달력에서는 세상이 끝나는 해가 아니에요? 태양계가 일직선이 되는해, 북극과 남극이 뒤바뀔 수도 있는 해, 종말이라고 하죠.

 

종말론의 위기에서 내가 죽어도 좋을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은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자리이면 그것이 깨어있는 자리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접할 수 있는 훈련들을 했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기도제목 있으시다면 기도제목 부탁드립니다.

 

잠언 30장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정직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가난 때문에 비겁하게 되거나 비굴하게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혹여 내가 가진 소유 때문에 교만하게 되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건방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2012.2.24]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목록

이메일주소 무단수집 거부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 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 됨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SITE MAP

팀뷰어 설치파일 다운받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