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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의 길 연재3] 희년을 만들어 가는 권력관계

작성자 : 희년함께 (218.39.85.***)

조회 : 2,195 / 등록일 : 21-08-23 10:14

[희년의 길 연재3]  

 

 

희년을 만들어 가는 권력관계

 


김덕영 / 희년함께 희년실천센터장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의 전환기,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집단적 노예생활에서 출애굽 해방을 경험한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새로운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 누구나 자신의 땅에서 땀 흘린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누린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다. 이 나라는 어떻게 유지되고 지켜져 가는가. 영원한 자유는 어떻게 보장되고 강화될 수 있는가. 이 문제의식을 나라의 근간인 율법에 담았다. 율법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은 공평과 정의의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하나님 아래 모든 존재가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을 책임지고 지켜가는 주체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이다. 자기 기업을 가진 모든 지파는 정직하게 자신의 땅을 일구고 땅이 없는 레위지파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주기 위한 십일조 의무를 다한다. 레위지파는 대속죄일 날 희년의 뿔나팔을 불며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속죄하고 모든 존재에게 이 나라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의 모든 존재는 율법 정신을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상기시켰고 입이 닳도록 전하고 또 전했다. 새로운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왕후장상(王侯將相)만의 일이 아니라 그 나라의 모든 생명이 자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주체적인 책임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율법 정신을 지키는 자작농이 자존감 넘치는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는 가운데 외부로부터의 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사사를 세워 12지파가 동맹을 맺고 대처했다. 그러나 점차 외부의 적은 강력한 왕의 권력과 일사 분란한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더군다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청동기 무기에 머무르고 있었던 반면 대표적 적대세력인 블레셋은 이미 철기 무기를 가지고 군대를 동원해 이스라엘을 위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권이 휘두르는 집중된 권력과 그 휘하 군대의 질서 정연한 전쟁기술에 맞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어떤 왕정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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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기 무기와 상비군을 앞세운 블레셋의 위협은 자연스럽게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고민을 이끌어 내었다. 우리에게도 강력한 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생겼다. 이웃 나라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상비군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일견 이해가 가는 타당한 제안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무엘과 야훼 하나님의 반응은 탄식이었다.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여러분이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렇게 하였을 때 왕에게 얼마나 많은 특권이 주어지는가를 명백하게 알아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던 왕에 대한 환상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돌아올 현실에 대해 사무엘은 말한다. 그 이전에 왕을 요구한 백성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방의 모든 나라와 똑같이 왕을 세워 주셔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또 하나의 이집트를 만들고자 그토록 힘겹게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온 것은 아니었다. 이방의 모든 나라와 똑같이 왕을 만들고자 했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과 자기 땅의 자존감 넘치는 계약 백성을 자처했던가. 제국의 비대칭적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었을 때 기층 민중이 겪어야 했던 존엄 잃은 삶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왕과 특권계층에게 의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 땅에서 구현하라고 주신 율법은 새로운 위기에도 창조적 비전의 계승을 요구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그저 생존을 위해 구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왕을 요구하기 전에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했다. 그들에게 없는 것은 철기 무기, 강력한 상비군과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이 처한 위험을 알리고자 한다. “너는 그들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러나 왕을 세움으로 인한 온갖 병폐를 그들에게 엄히 경고해 왕이 누리는 온갖 특전과 그것 때문에 당하는 백성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게 하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를 잊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이나 겪어야 했던 설움과 신음을 잊었다. 고난의 역사를 잊고 이스라엘이 선택하고자 한 현실적인 전략은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 비전이 우리의 현실을 좀 먹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들은 지금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있다. 그들은 나를 더 이상 그들의 왕으로 모시려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여호와로부터 떠난 것을 예민하게 파악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존재를 걸고 구현하는 비전 공동체에서 위기는 곧 기회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이방 나라의 왕정과 군대 조직을 구하는 것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 요구는 야훼 하나님과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는 우상숭배 공동체로 전락하는 길이었다. 비전을 잃은 백성은 망한다.

 

이스라엘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무엘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한다. 왕을 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라. “왕을 세움으로 인한 온갖 병폐를 그들에게 엄히 경고해 왕이 누리는 온갖 특전과 그것 때문에 당하는 백성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게 하여라.” 먼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구하는 왕의 권력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어떤 나라를 구하는가. 어떤 왕을 구하는가. 어떤 백성이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 비전을 가진 공동체에서는 왕을 구하기 이전에 이런 문제의식이 나와야 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이방 나라의 전제적 왕권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이행할 수 있는 새로운 왕을 세우고자 한다. 율법을 마음에 새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 존재 자체에 새겨져 있는 새로운 왕이어야 했다. 율법을 이행하는 왕이란 왕으로의 특권 이전에 백성을 섬기고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며 견인하는 존재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무엘이 기름 부은 왕은 사울과 다윗이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목격한 것은 권력 앞에서 너무나도 빠르게 변할 수 있는 한 존재의 연약함이었다. 야훼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존재가 아니고서는 주어진 권력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기 쉽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언제든 변질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처럼 강력한 상비군과 왕의 특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땀 흘리고 함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왕을 기대했건만 왕권을 지키기 위한 오욕으로 가득 찬 사울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사무엘은 눈을 감아야 했다. 왕의 권력을 통해 이스라엘의 새로운 비전을 담지한 왕정을 만들어 가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새롭게 부상하는 권력을 제거하는데 에너지를 소비해버린 사울은 블레셋에게 최후의 일격을 받고 죽기에 이른다. 사울의 정적이 되어버린 다윗은 제대로 된 왕의 교육과 비전을 사무엘에게서 전수받지도 못한 채 광야를 떠돌다 블레셋 진영에서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 왕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왕정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헤브론 유다 장로들에게 선물공세를 하며 다윗이 시작한 왕이 되고자 한 여정은 출발부터 분열 왕국의 씨앗이 되고 만다. 야훼 신앙을 무수히 고백한 다윗이었지만 이방 나라와 다를 것이 없는 왕권 강화에 심혈을 기울인다. 다윗의 강력한 상비군은 블레셋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족속을 복속시켰지만 처음부터 사무엘이 경고한 비대해진 왕권의 부담은 백성들에게 그대로 가중되었다. 다윗이 마지막 생애에 집중한 것은 성전의 건축이었는데 왕의 신실한 신앙심의 고백 이전에 어떤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가의 근본적 문제의식에서 비추어 볼 때 안타까운 일이었다. 야훼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나라는 자기 땅에서 자기 땀을 흘리며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자유와 해방이 지속 가능하게 보장되는 나라였다. 왕권은 그 비전에 철저하게 복속되어 있는 하위 수단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완성한 성전 건축은 왕에게 부와 권력의 집중된 상황에서 종교적 권력까지 더해진 셈이 되었다.

 

비대칭적으로 강화된 왕권은 대부분의 경우 백성의 시민적 자유와 해방에 걸림돌이 된다. 왕의 권력을 공평과 정의의 청지기적 역할로 제한할 수 있는 시민들의 문화적, 조직적 힘이 누적되어 있어야 한다. 왕의 권력을 건강하게 견제할 수 있는 백성들의 힘이 누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왕의 강력한 권력은 언제든 시민적 자유를 억압하는 길로 가기 쉽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다윗이었다고 하지만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에 이르러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솔로몬 왕은 처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부역을 일으켰지만 후에는 병거와 기병을 위한 국고성, 혼인 정책으로 결혼한 이방인 파라오의 딸을 위한 궁전, 그리고 배와 선단을 만드는 일까지 부역을 동원했다. 솔로몬 왕이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왕권에 집중시킨 결과는 왕이 독재자가 되어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한 구체적인 열매로 드러났다. 하나님과 사무엘이 경고한 왕정의 폐해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솔로몬의 패착은 그 아들 르호보암에게서 더욱 강화되었고 결국 분열 왕국을 초래하고 말았다.

 

다윗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는가. 이스라엘 율법의 핵심 특징은 지속 가능한 장기 비전의 구축이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사회경제적 조치는 한 세대뿐 아니라 여러 세대가 이어서 공평과 정의의 통치 구조를 확보하는 비전으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동시대적으로는 각 지파별 인구수에 비례한 기업의 분배를 통한 사회경제적 리더십을 지파별로 구축한 상황에서 사사를 중심으로 한 중앙적 종교권력은 이스라엘의 비전과 정체성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지파별 지방분권적 정치권력과 중앙 집중적 종교권력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이스라엘의 공평과 정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다윗의 왕정은 주변 나라를 복속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스라엘의 권력 질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지에 대한 구체적 그림과 준비가 부족했다. 과도하게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만 집중된 일련의 조치들은 기존 주변 왕정과의 차별성을 낳지 못했다. 비대해진 왕권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균형 잡을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할 이스라엘 사회와 문화는 충분한 내적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왕정에 종속되어 버렸을 뿐이다. 국가의 역할과 사회의 역할이 상호 견제 협력하지 못할 때 이스라엘의 비전은 희석되고 만다. 다시 묻는다. 다윗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는가. 그렇다면 다윗과 솔로몬이 만든 왕정의 결과에 대해 책임 있는 답변이 있어야 한다. 다윗과 솔로몬이 보여준 왕정의 한계는 이후 분열 왕국에서 더욱 큰 한계로 심화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고야 만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는 백성의 자유와 해방이 확대되는 결과로 드러난다. 거듭되는 왕권의 강화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 안연히 거하고 있던 백성들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면 그들이 탈출한 이집트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불순종의 책임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감당해야 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최종적 심판이 임했다. 신명기 사학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그발 강가에서 이스라엘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했다. 그 성찰의 지점은 사무엘에게까지 거슬러 올랐다. 이방 나라처럼 강력한 왕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방 나라와 다른 새로운 왕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다윗 역시 주변 나라보다 좀 더 강력한 군사력으로 튼튼한 왕권을 구축하는지가 핵심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거하는 주체적이고 책임감 넘치는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한 절제된 왕권을 고민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이후 분열 왕국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절제된 왕권에 대한 개념은 점차 흐려지고 급기야 북이스라엘 아합 왕은 페니키아의 절대왕권 개념을 도입해 왕의 부와 권력을 더욱 강화했으며 이스라엘 사회경제제도의 근간을 이룬 희년 개념을 의도적으로 지우고자 했다. 나봇은 피를 흘려가며 자신의 땅, 자신의 기업을 지키고자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서 역사에 의로운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다시 사무엘의 고민으로 돌아가 보자. 왕을 세우기 전에 그가 이스라엘 전역을 순회하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본연의 가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토록 가르치고자 했던 이유를 상상하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 그리고 비전이 내재화되어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새로운 왕을 구하고 새로운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회의 문화적 힘으로 비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는 생존의 두려움에 복속되어 단기적 왕권강화의 길만을 모색했다.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을 세우고자 했지만 모세와 사무엘이 품었던 이스라엘 전체의 지속 가능한 공평과 정의의 체제를 구상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왕권 강화의 결과는 이스라엘 사회의 양극화와 희년정신의 퇴화로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희석된 희년의 정신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국가 권력에서도 이상적인 옛이야기 일 뿐이었다. 자기 땅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땀 흘리던 이스라엘은 자신의 기업을 잃어 갔다. 땅에서 유리된 많은 백성들이 다시 부역과 부채, 노예 노동의 상태로 돌아갔다. 가난한 자의 신음이 다시 땅에서 진동하니 하나님 나라를 내세웠던 이스라엘은 이전의 이집트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출애굽의 제도화는 철저하게 실패하고야 말았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성령

 

비전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과 왕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것에 실패했지만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했던 성령이 가난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졌다. 왕이자 제사장이자 예언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눌린 자, 포로 된 자, 병든 자, 눈먼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소식은 위축되고 결박된 그들의 마음을 해방시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인의 삶으로 이끌었다. 마음의 해방으로 부자도 부에 노예가 되지 않았고 노예조차도 육신의 굴레에 더 이상 자신의 존엄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은 진정한 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부와 권력을 독점하여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자기 제자의 발을 씻기며 철저하게 섬기는 자의 모습이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결단한 그의 진심은 십자가에서 전적으로 자기 몸이 부서지는 데까지 미쳤다. 그런 그의 철저한 죽음을 하나님이 인정했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마음으로 약속한 성령을 구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에게는 새로운 왕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그들의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창조적으로 실천해냈다. 공평과 정의의 실천을 구체적 삶과 공동체에서 구현하자 그들의 공동체에는 눌린 자 가난한 자가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인들의 등장은 로마 제국의 신민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예수 제자 공동체의 새로운 삶은 로마 시민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제공했다. 자유인들의 공동체는 사무엘이 그토록 열망했던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구현한 모습이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했다.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에게 실제적 기쁨을 가지고 온다. 지금 우리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열매가 없으면 성령이 임하지 않은 것이다. 자아도취적 자기만족만이 남은 존재들은 맛을 잃는 소금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 돌아올 뿐이다.

 

시민사회의 참여와 국가 권력의 제도적 전환의 상호 협력 가능성과 교회 공동체의 역할

 

2017년 한국사회의 촛불시민혁명은 민주시민의 자유를 향한 주체적 참여의 가능성을 한층 고무시켰다. 시민들의 각성과 자발적인 참여의 열기로 고조된 분위기는 한국사회의 부패한 권력에 대한 강력한 견제가 되었고 이후 탄핵과 정치세력 교체로 이어졌다. 새롭게 등장한 문재인 정권은 촛불 정권임을 자처하며 권력기관의 개혁과 공정을 화두로 던지며 다양한 분야에서의 혁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시민적 자유의 핵심적 분야인 경제 분야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특별히 최근 서울의 아파트 값의 급격한 상승 국면에서 무기력하게 대응한 부분은 시민사회의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반면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는 정부의 발 빠르고 투명한 대응과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 방역 수준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부 주도의 일방적 방역이 아닌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분야에서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효과적인 유동성 관리에 실패했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데 이렇다 할 제도적 조치를 구사하지 못했다. 개별 시민들도 부동산에 대한 자산 가치가 오르는 것에 혈안이 되어 경쟁적인 부동산 매입과 과도한 대출 러시를 감행한다. 망국적 부동산 투기 문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성찰과 책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에 더해 정부는 실패한 정책을 인정하기보다 여전히 정부 주도의 부동산 정책을 신뢰하라고 다그칠 뿐 시민사회를 설득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야 할 파트너로 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시민사회와 정부의 악순환이 확연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시민적 참여로서의 자원적 희년 가치와 국가 권력을 통한 제도적 희년 비전을 제시해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층 더 어둡다. 그나마 한국 시민사회와 정부의 협력적 대응 모델로서 제시되고 있는 방역사례에서도 교회 공동체는 대표적인 불통 집단으로 기억되고 있다. 교회는 방역수칙을 어기는 시민의식이 실종된 이익 집단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산 가치가 극대화되고 없는 자, 가난한 이의 상실감이 부각된 상황에서도 대표적 대형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주차장 부지를 매각하여 무려 2,400억의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겼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과 상상력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희년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너무나도 큰 거리감을 보여주는 현재 교회의 모습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서도 간절한 성전 중심의 예배와 제사에 치중했던 자아도취적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임박한 심판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떤 열매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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