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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의 길 연재4] 가난한 이에게 전한 기쁜 소식

작성자 : 희년함께 (218.236.131.***)

조회 : 1,682 / 등록일 : 21-11-22 10:40

가난한 이에게 전한 기쁜 소식

 

희년함께 김덕영 희년실천센터장

 

사도 바울이 가난한 이에게 전한 기쁜 소식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일은 사도들에게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반면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은 유대인에게 전한 복음과 매우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도를 설명한다. 그의 방대한 재해석 작업은 비로소 유대교와 체계적 차별성을 가지는 기독교의 탄생을 의미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구약 성서를 재해석하여 모든 이방인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우주적 진리로서의 복음을 전한다. 곳곳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서는 특별히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다. 두란노 서원은 당시 주요 문화였던 헬라 철학 담론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사도바울은 헬라철학과 이방 종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우주적 진리로서의 기독론을 펼친다. 히브리 전통의 율법에 정통했으며 당대 그리스 철학까지 섭렵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었기에 그리스 철학과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 차별적인 복음의 구체성을 펼칠 수 있었다.

 

창조주와 인간의 계약으로 구성되어 있는 히브리 사상은 철저하게 일원론 세계관과 유일신에 기초한다. 반면 헬라 철학은 이데아를 지향하며 물질세계는 가변성과 유한성의 한계로 인식했다. 이원론의 세계에서는 현세의 물질세계와 노동의 가치가 경시되었다. 헬라 철학의 담론은 그리스 경제를 떠받치고 있었던 노예노동과 구별된 고담준론이었다. 반면 정통 히브리 사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존엄한 존재에게 자기가 땀 흘린 노동의 열매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땀 흘린 만큼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자기 땅의 유지가 중요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당시 흙의 사람들이라 불리던 소작농들이 모여 살던 나사렛에서 막노동으로 하루의 양식을 직접 구해야 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노예 노동을 하던 노동자의 복장을 그대로 입고 철학 담론장 이었던 두란노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펼쳤다. 무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앞치마를 두른 바울의 모습은 당시 밑바닥 막노동꾼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지적 토론의 장에서 헬라 철학이 경시하던 노동자의 복장을 한 사도 바울은 언어적으로, 비언어적으로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관습에 파격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도 바울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의 사역의 중심은 밑바닥 인생들의 존엄성을 상기시키고 땀 흘리고 노동하는 것의 강조를 통해 공동체적 가난의 해결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일시적 시혜를 베푸는 공동체의 의무사항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위축되고 가난한 영혼을 회복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자연적 권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분명한 기조는 손을 벌리지 않고 직접 노동을 통해 선교 사역비를 충당한 것에서도 확인되며 무엇보다 가장 밑바닥 막노동꾼의 노동을 직접 하는 것을 자기 사역의 핵심 정신으로 인식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노동자들 사이에도 가장 힘든 노동으로 꼽히던 부두 노동에 나서기 까지 했다. 가장 힘들고 천하다고 인식한 노동을 통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확고하게 사도 바울에게 자리 잡은 복음은 가난한 자, 가장 밑바닥에서 천시 받는 자에게 전해져야 할 기쁜 소식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도 바울은 막노동을 자처하며 노동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원했다.

 

사도 바울의 정신은 이스라엘 근본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 땅이 없이 노예 노동으로 전락한 히브리 노예들을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야훼신앙이었다. 모세는 창조주의 정신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 정신을 기약하고 후대에도 확고히 전수하고자 시내산 계약을 체결한다. 율법의 정수인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은 모두 이 땅의 밑바닥 인생에게 전해 진 기쁜 소식이었다. 피안의 세계를 약속하는 것으로 그치는 기쁜 소식이 아니다. 그 정도로는 무기력과 정체성 상실로 얼룩진 밑바닥 인생들에게 웃음하나 선사할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전한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마음의 양심의 법이 있으며 모든 만물에도 창조주의 원리와 원칙이 들어있다고 역설했다. 그리스의 신들과 달리 창조주는 노동을 하기 싫어하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을 직접 손으로 만든 노동자였으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가난한 나사렛 동네에 태어난 노동자였다. 창조주는 노예와 모든 시민을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대하며 그들이 직접 땀 흘린 소중한 대가를 그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정신을 공평과 정의로 보았다.

 

복음은 헬라 철학이 등한시 했던 노동에 대하여 완전하고도 다른 접근과 태도를 가진다. 사도 바울의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에 당대의 밑바닥 인생들과 진리를 갈구했던 지식인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더 이상 아데미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상은 의미가 없었다. 사도 바울의 강력한 강론에 에베소가 뒤흔들렸다. 사도바울은 헬라 철학자들과도 달랐으며 아데미 신전의 사제들과도 달랐다. 그 사도 바울의 복음에 정직하게 반응했던 지식인 중 한 명이 바로 누가였다. 누가는 이방인이면서 헬라 문화권의 의사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는 안디옥에서 사도의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새로운 삶의 양식과 철학에 충격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누가의 문제의식은 도대체 이 가르침과 삶은 어디서 시작 되었는가였다. 누가는 복음의 출처를 추적하고 그 역사를 면밀히 기록하였다. 그의 뜨거운 신앙과 끈질긴 열정의 기록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다. 누가가 확인한 것은 사도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에게서 온 것이었고 예수는 메시아였다. 그 메시아는 구약 예언자들이 강조했던 시내산 계약의 정신을 계승할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메시아였다.

 

 

메시야가 가난한 이에게 전한 기쁜 소식

 

누가가 주목한 예수는 공생애를 메시아 취임선언으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철학과 방향성을 선포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절 말씀을 선포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예수는 주의 성령이 임하신 목적이 바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함을 분명히 밝힌다. 기쁜 소식은 은혜의 해, 바로 희년이었다. 희년은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구약 예언자들의 이상향이자 출애굽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준거점이었다.

 

은혜의 해, 희년은 해방의 정기적 호흡의 최종 귀결점이었다. 이스라엘은 칠일 안식일마다 모든 노동자와 가축에게까지 쉼을 허락했다. 착취적 노예 노동이 아니라 쉼과 안식이 있는 노동으로 모든 고용주의 권한을 제약했다. 칠년 안식년은 면제년으로 7년이 되는 모든 부채는 탕감되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부채를 지더라도 그 부채가 한 존재와 가정을 삼키는 것을 제약했다. 또한 땅도 쉼을 얻었다. 칠년의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그 다음 해 희년에는 모든 토지가 원 소유자에게로 반환되었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자기 자산을 보장해주었으며 토지의 양극화가 발생하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해의 철학은 분명하다. 가난한 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정기적으로 보장하고 확고히 하는 것이다. 희년의 정신은 분명히 가난하고 눌린 자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피안의 세계를 갈망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삶을 회복하는 소식이었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희년의 꿈을 다시금 선포한 것이다. 메시아의 희년 선포는 허울뿐인 외침으로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가난하고 눌린 자들, 죄의식에 사로잡혀 위축된 자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갈릴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고 분명히 외쳤다. 반면 희년의 정신을 이상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부와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당대의 기득권에게는 분명한 경고와 심판을 선포했다. 부자가 구원을 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했으며 공평과 정의의 길을 외면한 성전에서 예수는 채찍을 들었다. 예수의 희년 선포는 당대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실제적 구원이 되었다.

 

예수를 따라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제자 공동체는 이웃의 가난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팔아 공동체의 결핍을 채웠다. 또한 위축되고 눌려있는 마음을 회복해 종이나 노예나 여성이나 하나님 나라의 주인의식을 가지게 했다.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을 넘어 가난한 이를 무시하고 타자화한 당대의 모든 문화와 사조를 타파했다. 그들을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자 주인공으로 세웠다. 가난한 사람 입장에서 총체적 회복과 해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람과 삶이 바뀌고 문화와 양식이 바뀌는 초대 교회 공동체는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반면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를 끊임없이 양산해 내는 당대의 모든 권력과 문화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다. 제자 공동체는 이 위협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제자 공동체의 모습은 현재 한국 교회가 서 있는 지점과 매우 대조된다. 우리는 가난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 피안의 세계를 자족적으로 강조하는 것 말고 실제로 가난하고 위축된 영혼들이 기쁜 소식을 찾아 교회로 오고 있는가. 교회만 기쁜 소식이라고 강변할 뿐 가난한 이웃은 실제로 아무런 위로도 기쁨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은 한국 교회의 현재 위치를 정직하게 성찰하게 한다. 황석영의 문제적 소설 손님은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가난한 이에게 여전히 반갑지 않은 손님, 한국교회

 

소설 손님은 한국 전쟁과정에서 벌어졌던 황해도 신천군의 끔찍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신천군에서는 치열한 전쟁와중 전선이 뒤바뀌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과 사회주의 세력 간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195010월부터 12월까지 불과 50여 일 간 35천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신천군 학살사건은 마을 주민 간에 내재해 있던 계급적 갈등, 종교 문화적 갈등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집단 학살 사건이라는 것이 작가 황석영의 시각이다. 이후 계속된 자료 조사는 위 갈등 구도를 더욱 확인해 주었다. 황해도 신천군 학살 사건에 대한 황석영 시각은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 뿐 아니라 현재 기독교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뿌리 깊은 적개심의 연원을 보여준다. 작가는 말한다. 한 세대를 지나지도 않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손님으로 찾아 왔다. 그런데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조선 민중들이 마마또는 손님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천연두와 같은 질병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세력은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황석영의 시각에서 보면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사상과 종교가 같은 마을의 주민을 서로 죽이게 만든 둘 다 무서운 손님이었다는 것이다. 신천군 뿐 아니라 해방공간에서부터 한국 전쟁이후 현재까지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황석영의 시각은 결코 과장되었거나 편견으로 보기 어렵다.

 

한국 교회는 현재까지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칭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은 광화문에 모여서 지금까지 내세우는 구호가 친미, 반북이다. 여전히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빨갱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보여준 해방의 삶은 오히려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이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교회는 빨갱이와 사회주의를 악마화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북한과 사회주의 사상을 대적하는 것을 동일화하고 있다. 가난한 이를 돕고 구조적 해결을 모색하는 모든 시도를 사회주의 혁명과 연결시킨다. 가난한 이웃에게 빵을 주며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더라도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는 보장해주는 것이 오늘날 가난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초대 제자 공동체가 가난한 자에게 전한 기쁜 소식과 한국 교회가 전하고 있는 기쁜 소식과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예언가들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이 강조한 가난한 이에게 전한 기쁜 소식은 지금 한국교회가 외치는 하나님 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황석영의 손님 역시 한국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황석영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가난한 자들이 보기에 교회는 여전히 반갑지 않은 손님에 불과하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메시지를 가난한 자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교회 공동체 자기들의 땅과 계급적 위치를 지키고자 했던 열심당의 메시지로 읽었다. 그 이해에 반하는 존재들은 교회로부터 악마 취급을 받는다.

 

기독교인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서울의 강남은 부동산 공화국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한국 사회 가장 비싼 땅에 위치한 대표적 대형 교회들은 높은 부동산값에 상응하는 최고 엘리트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사회적 지위와 부에 걸 맞는 웅장한 건물은 가난한 이들에게 찾아가기 어려운 첨탑이 되었다. 교회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주요 초점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성공하는 것인가이다. 우리의 성공을 자랑함으로 교회에 나와 복을 받고 싶게 만들고자 한다. 그것이 가난한 이웃에게 전할 소망이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에 나와 복을 빌고 그들처럼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는가.

 

가진 자들이 자산 가격 상승의 축제를 벌이는 동안 소리 없이 사라지는 존재들이 있다. 우리 나라 최고 엘리트들이 개발 이익을 독점하고 부동산 카르텔 정보를 공유하며 재산 불리기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흙수저 청년은 창문 없는 고시원, 원룸에서 소득의 3분의 1을 주거비에 쏟아 부으며 침잠하고 있다. 쪽방촌 주민은 그나마 나오는 기초 생활 수급비와 주거보조비, 폐지를 주워가며 겨우 벌은 생활비 대부분을 전기도 보일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1평짜리 방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다. 쪽방촌과 고시원의 주인은 누구인가. 강남의 타워펠리스에서 안락하게 살며 빈곤비즈니스를 양심의 가책 없이 펼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실제적인 기쁜 소식은커녕 이들에게 주어지는 내세의 소망도 참으로 남루하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을 시장에서 탈락된 실력 없고 경쟁력 없는 낙오자로 보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 자신의 게으름과 부족함을 먼저 참회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기본 시선이다. 가난한 이들은 그저 루저에 불과할 뿐이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장 번듯한 명품 옷을 입고 오늘도 강남의 가장 화려한 예배당에 나서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사님들에게 과연 아모스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아모스 4:1) 여사님들은 인격적으로 훌륭하며 신앙생활과 경건생활을 철저히 하며 매우 교양이 넘치는 양심적인 분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절망과 위축과 분리를 낳고 있다면 아모스가 말한 바산의 암소들과 우리의 모습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한국 교회의 성령이 임한 증거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가 삼중 축복과 오중 축복을 받는 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인가. 가난한 이들이 우리가 삼중 축복 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며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교회로 나오고 있는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눈에서 사라졌고 소리 없이 골방에서 죽어가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너무도 교회의 실제 모습을 잘 알고 있고 자기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정확히 읽어낸다. 이들은 교회가 나눠 준 초코파이에 넙죽 고개를 숙여줄 뿐 마음을 주지 않는다. 교회 역시 더 이상 그들이 복음의 대상이 아니다. 교회는 자부심이 넘칠 정도로 이미 최고의 엘리트들로 가득 차 있다. 더 이상 가난한 이에게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성령이 임한 증거가 분명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막노동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며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소망을 증거 했는데 오늘 교회와 교인은 너무도 부유하다. 우리는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게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빵은 있을지 모르지만 기쁜 소식은 없다.

 

왜 창조주는 히브리 노예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왜 모세는 출애굽의 정신을 제도화 하고자 했을까? 왜 메시야는 가난한 나사렛 동네에서 희년을 선포했을까? 왜 예수의 제자들은 그토록 가난한 자들을 강조했을까? 왜 베드로는 가장 가난하고 천한, 냄새나는 피혁공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을까? 왜 사도 바울은 가장 힘든 막노동 부두 노동을 자처했을까? 가장 가난하고 천한 존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말할 수 있는가. 그 명징하고 단순한 진실 앞에 정직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단순하다. 우리에게는 자유와 해방의 희년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창조주의 정념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여전히 가난한 이에게 불편한 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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