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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구할 두 권의 책 연재2] 김회권, 구약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석하다

작성자 : 희년함께 (219.254.37.***)

조회 : 1,390 / 등록일 : 22-06-22 17:00

[세계를 구할 두 권의 책 연재2] 김회권 : 구약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석하다

 

세계를 구할 두 권의 책

- 김회권의 자비 경제학과 강인태의 하비루의 길비교 서평 -

 

 

 

. 김회권 : 구약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석하다

 

 

남기업(희년함께 공동대표/토지+자유연구소 소장)

 

 

통섭의 신학자 김회권

 

김회권은 요즘 말로 하면 통섭의 신학자다. 왜 그런지는 지금 소개하는 자비 경제학을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성서학을 바탕으로 역사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구성한다. 일찍이 이런 신학자를 본 일이 없다. 김회권은 성서학자이면서 기독교 문명 비평가 혹은 역사철학자로도 불릴 만하다.

 

그의 책 2장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도 수준급이다. 불평등과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의 현실을 유려한 필체와 논리로 전개한다. 주장의 근거로 사용한 논문들과 책의 목록을 보면 성서 연구를 하면서 언제 이런 문헌들을 읽었는지 놀랍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회과학 연구 논문들과,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나 칼 폴라니, 헨리 조지 등이 쓴 저작의 핵심 내용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거기에다 시장경제의 우수성을 규명한 학자로, 혹은 경제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시장 만능주의를 주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국부론보다 한참 전에 쓴 도덕감정론을 통해서 밝혀낸 부분을 읽으며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도덕감정론을 직접 읽고 정리하면서 스미스가 구상한 경제체제가 정의 도덕과 자비 도덕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을 논증하니 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지적 호기심의 발로일까? 그럴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하나님의 관심과 그의 관심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관심은 좁은 의미의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 대상은 인류 역사, 창조 세계 전체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의 고통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탄식하시고 그 고통에 동참하는 분이다. 이런 까닭에 김회권의 관심도 세계 역사 전체가 되는 게 자연스럽고 거기에서 나오는 고통 소리를 모든 학문을 통해서 들으려고 한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대천덕보다 더 대천덕에 가까운 김회권의 성서 해석

 

그러면 이제 자비 경제학의 핵심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김회권은 이 책에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을 전개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전개한 하나님 나라 경제학의 기본 아이디어가 예수원의 설립자인 고() 대천덕 신부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대천덕 신부는 일찍이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아합 왕가가, 소수가 땅을 독차지하는 바알의 토지법을 들여왔고 그때부터 시내산 율법의 핵심인 토지 정의가 훼손되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자유농민의 소작인화가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김회권은 저서에서 토지 정의가 모세 5경은 물론, 이사야, 아모스, 미가, 호세아, 예레미야의 중심 주제임을 치열하게 밝힌다. 그냥 읽으면 토지 정의와 무관하게 보이는 성서의 본문도 역사적 맥락과 단어의 본뜻 풀이를 통해 성서가 말하려고 한 바를 마침내드러낸다. 이런 까닭에 그는 구약의 예언자를 정치경제학자로 명명한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당시 이스라엘 붕괴의 전모를 파헤친다. 마치 대천덕 신부의 위대한통찰을 입증하려고 글을 썼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필자가 봤을 때 그의 글은 대천덕보다 더 대천덕에 가깝다.

 

바로 여기서 그가 신학이 아닌 기타 학문 중에 유독 정치경제학에 집중한 까닭을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학자들은 많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주된 대상으로 한 사회복지학에 대해서도 관심 있는 신학자들도 제법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두는 신학자는 소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정치경제학적 해석을 하지 않으면 불의의 핵심 원인, 복지 수혜자들이 폭증하는 원인, 즉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자, 눈먼 자, 고아와 과부 등이 폭증하는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적 해석을 하지 않으면 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우상숭배의 본질을 드러내기 어렵다.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통과하지 못하면 죄와 우상숭배를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영역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게 되고, 결국에는 기독인들이 구약을 멀리하게 되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되는데, 김회권은 이런 한계를 너끈히 극복한다. 구약 예언자들의 정치경제학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슴 뛰게 하는 십계명 해석

 

자비 경제학에서 가장 흥분되는 장은 6십계명 제1계명의 사회경제적 함의. 필자는 6장을 탐독하고 흥분되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밖을 한참이나 서성거려야 했다. 기독/비기독교인을 떠나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접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배타성이다.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라는 이미지의 절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김회권은 십계명이 결코 배타적인 종교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 계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법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금지가 십계명의 첫 계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왕실과 상류층의 토지 수탈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신들인 바알-아세라가 이스라엘의 자유농민의 땅을 빼앗고 사회를 해체시키고 멸망을 불러온 근본 원인이라는 깊은 신학적 성찰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이르려면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율법들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해 제정해 준 신성한 법”(323)이라는 성서관을 극복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십계명은 광야 생활 당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불러주었다고 생각하는 전통적 성서관은 한계를 지닌다. 김회권이 말하듯이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는 제4계명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이스라엘 사회가 종, 객 등으로 계층화된 이후에야 의미 있게 들리는 계명이다. 하지만 광야 생활 당시에는 땅 혹은 전토 자체가 없었으며 종과 노예, 문 안에 머무는 객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계명을 포함한 십계명은 사회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유력한 지배층 사람들의 탐욕과 죄악을 경계하고 억제하는 법, 그러니까 땅을 빼앗겨서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아우성이 반영된 법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십계명이 상정한 사회는 확실히 바알-아세라와 같은 다른 신들을 경험한 이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즉 제1계명을 어긴다는 것은 자유농민의 땅을 강탈한 것이 되고, 그것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을 어긴 것, 요약하면 거룩한 나라의 경제 질서를 붕괴시킨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십계명에서 우상숭배가 엄격히 배격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서는 지배층의 탐욕과 권력 남용을 제지할 권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다른 신들은 특권층의 탐욕과 권력 남용을 정당화해준다. 이렇게 정리하면서 김회권은 구약의 율법들은 고통당하는 백성(민중)의 아우성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각 시대에 맞게 조율된 신-인 합의의 산물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십계명에 대한 이런 해석은 대천덕 신부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면 대천덕 신부의 성서관은, 십계명은 광야 생활 당대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이라는 관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위와 같은 김회권의 성서관과 해석이 대천덕 신부의 주장을 더 든든히 지지해주고 있다. 필자는 김회권의 성서관이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권위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김회권이 말하듯 십계명을 비롯한 성문 율법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참사를 겪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성서를 성서답게 해주고, 하나님을 더 하나님 되게 해준다고 본다. 십계명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십계명을 단순히 관념적으로, 좁은 의미의 종교적 언어로 이해하고 있는 필자와 같은 신앙인들을 흔들어 깨우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점은 모세의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핵심으로 한 율법 체계의 역사적 기원을 고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특히 주전 40~20세기까지 존속했던 고대 수메르 문명권의 경우에는 왕과 평민 모두 천혜 자원을 공유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과 이 문명에서는 신들의 초월적 통치에 대한 두려움과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에 대한 존중이 내재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 땅을 잃고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상실하여 표류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 경영에 어려움이 생기는 까닭에 함무라비의 법들은 노예해방이나 채무 변제 칙령들을 발표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이런 역사적 기원이 있는 형평법령과 자비법령을 고대 이스라엘이 계승하여 독특하게 발전시킨 것이 바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물론 김회권이 언급하지 않지만 시내산 율법의 내용이 훨씬 포괄적이고 촘촘하며, 특정 왕의 시혜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하여, 즉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항구적으로 제도화한 것은 엄청난 차이점이다. 게다가 시내산 율법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니라 자유롭고 당당한 자유농민을 주축으로 한 지파 연합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당대로 돌아가서, 특히 모세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김회권의 해석이 사실에 부합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당연히 위와 같은 역사와 철학과 종교를 섭렵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주된 관심이 히브리 노예를 해방하여 모든 사람이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아가는 거룩한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역사적 사실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무릎을 친 부분은 시내산 율법의 강조점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청산하라는 것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논거로 항상 제시되어왔던 구절인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치니라”(신명기 1511)에 대한 본뜻 주해다. 이 구절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독인을 낙담시키는 용도로 사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김회권은 히브리어 구문으로 보면 정녕 가난한 자가 땅의 소출을 누리는 데 있어서 절대로 배제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382)가 올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 신명기 1511절은 공평한 토지분배를 강조한 것이다.

 

토지 기본소득이라는 대안 제시

 

그러면서 그는 토지를 바탕으로 한 기본소득을 토지 정의를 구현할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재산권의 신성함을 논하는 로크의 토지사유제를 반박하는 동시에 기본소득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페인의 토지 정의론을 자세하게 정리하면서 토지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 대안이 모세오경의 땅 신학에 근거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의 성서적 토대가 분명함을 논증한 것이다. 여기에서 김회권이 단순한 문명 비평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신학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필자에게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전개되어 온 공평과 정의의 역사를 모두 하나님 나라의 역사라고 선언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세속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면 역사 속에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는 모든 곳에 하나님이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필자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고 하려면 세계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정의로운 움직임들을 성서로 품어 안을 수 있어야 하고, 역사의 흥망성쇠도 성서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가 지금까지 봐온 책, 특히 교회사와 관련된 책은 그렇지 않았다. 성서의 관점에서 교회사와 세계사를 통합해서 하나로 다루는 책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서술은 없지만, 최소한 김회권은 하나님을 명실상부한 역사의 주관자로 묘사하고 있다.

 

개인구원/사회구원도식을 넘어설 수 없을까?

 

하지만 그의 책에서 느끼는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기존 구원관 도식인 개인 구원/사회구원의 틀을 그대로 가져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는 개인 구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비하여 사회적 구원인 공평과 정의에 대한 관심을 다소 결여하고 있다.”(293)는 문장에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사회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쓴 그의 논문 사회선교의 정당성과 전망에 대한 고찰”(2021)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개인 구원은 뭘까?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문맥상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사회적 구원은 아마도 이 책이 강조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주류 교회의 구분이기도 하다. 사회변혁에 관심 있는 기독인들이 주로 언급하는 로잔언약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다. 로잔언약은 개인 전도와 사회정의 추구는 동반자 관계로서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틀은 십계명을 포함한 시내산 율법과 그 정신으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메시지, 그리고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다. 기존의 개인 구원/사회구원혹은 개인전도/사회선교에서 개인 구원이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사회구원은 변화된 존재가 전개해야 할 실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사회구원(사회선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으로만 남게 된다는 난점이 생긴다.

 

이 둘이 결합 되려면 구원의 필수 조건인 회개의 내용에 김회권이 새롭게 해석한 십계명과 예언자들이 외친 공평과 정의에 바탕을 둔 토지 정의 법령들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나라가 망한 것처럼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개인 구원/사회구원이라는 도식이 극복될 수 있고 사회구원을 위한 활동이 선택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구약과 신약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회권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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