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기도회 때 우리 희년함께 회원이신 목찬희 자매님에게서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목찬희 자매님은 지난 희년함께 총회 때 같이 오신 박보애 자매님과 ‘예수살기’와 ‘희년살기’ 중에 뭐가 더 어려울까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목찬희 자매님은 박보애 자매님에게서 예수살기보다 희년살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마음속으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살기와 희년살기 중에 정말 뭐가 더 어려울까? 그런데 마음속으로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희년이시다!”
사실 “예수님이 희년이시다”라는 말은 마이클 카드가 부른 ‘Jubilee’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걷기운동을 하면서 MP3플레이어로 들었던 노래 중에 마이클 카드가 부른 ‘Jubilee’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희년함께가 만든 ‘희년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엔딩 장면에 나오는 바로 그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마이클 카드는 “Jesus is our Jubilee. He is the incarnation of the year of Jubilee(예수님은 우리의 희년이시다. 그는 희년의 성육신이시다)”라고 노래합니다. 걸으면서 이 노래를 자세히 음미하며 듣는데, 이 가사가 처음에는 왠지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뭐? 예수님이 희년의 선포자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희년이라고? 게다가 예수님이 희년의 성육신이라고?”
그러면서 속으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희년이시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음악을 들으면서 계속 걸으며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년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시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읽은 ‘예수의 정치학’에서 존 하워드 요더가 말한 “희년은 하나님 나라의 전조”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또 동방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겐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하나님 나라(Auto-Basileia)”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희년은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자 근사치이다.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 나라이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희년의 선포자가 아닌 몸소 희년이시다.”
희년은 단순한 사회적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희년을 50주년이 되는 해 또는 땅과 집과 몸을 되찾는 해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희년은 단순히 50년이 되면 기계적으로 찾아오는 절기나 제도, 숫자가 아닙니다. 또한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인격적인 만남 없이 기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실행되는 토지반환 프로그램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희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희년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실현됩니다. 따라서 희년은 인격적이며 공동체적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는 본질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뜻하며 공동체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희년은 단순한 부의 재분배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제도가 아닙니다. 희년은 약자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도, 사회 전체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하는 것도,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손을 따르면서 업적에 따라 분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희년이 구약 레위기, 그중에서도 성결법전(Holiness Code)의 최절정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양각나팔(요벨)소리와 함께 선포되는 것도 희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희년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범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약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법궤에 손을 댔다가 죽은 웃사처럼, 급살(?)을 맞아 죽은 것도 바로 성령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희년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범하는 것이며, 우리들의 구원과 생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존 하워드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에서 “희년의 실천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천국을 위한 선결 과정에 속한 것이었다. 이 길에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클레멘스는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인간들과 함께 코이노니아 하셨기 때문에 인간도 다른 사람들과의 코이노니아 속에서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부도 다른 사람들과 코이노니아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이웃을 사랑하고 코이노니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자신이신 희년을 거부하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멸시하고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잠언 기자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잠언17:5)라고 말하고 있으며, 신약의 요한일서 기자는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일서 4:20)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실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몸소 하나님 나라이시자 희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셔서 희년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희년은 성령님의 힘과 임재 없이 인간의 도덕적 결단이나 자유의지, 인간의 선함과 지혜만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이나 제도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희년의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서14:17)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주의 성령이 임하신 후에 선포되며,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임하십니다. 희년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능력과 임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형식적인 빈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실현하려는 희년 제도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려는 더 지독한 우상숭배나 인본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희년은 오래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이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희년은 지킬 수도,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소 희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좇아야 합니다. 희년은 성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희년의 성육신적인 사회모델은 ‘삼위’와 ‘일체’이신 (경륜적,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모습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희년은 개인주의(Individualism)도 집체주의(collectivism)도 아닌 사회적 인격주의(Social Personalism)에 가깝습니다. 희년 사회는 사회적 인격주의가 실현되는 사회입니다. 케네스 리치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사회적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짐 월리스는 “하나님은 개인적이시지만 결코 사적이지는 않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남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희년이,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과 함께 임하는 것이라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희년이 임할 때까지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요? 대천덕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문제의 해결자이시고, 기도하면 성령님을 통해 지혜를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희년은 우리들의 믿음과 기도, 순종에 따라 하나님의 때에 성령 하나님을 통해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희년운동을 해오면서 (저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들에게서 궁극적으로 느꼈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년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탐욕과 두려움, 교만과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적인 죄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사탄 마귀나 인간의 죄가 더 크다는 말입니다.
‘예수살기’가 바로 ‘희년살기’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를 쳐부수시고 승리하셨으며, 인간의 뿌리 깊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C. 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본질적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 남은 잔당을 토벌하는) 소탕작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의 하나님 나라 ‘전쟁’은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고,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아있는 소탕작전 ‘전투’만 치르면 됩니다.
이제 여기서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말했던, 예수살기와 희년살기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살기가 곧 희년살기이며, 희년살기가 바로 예수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희년이십니다. 희년의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희년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희년의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희년의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갑시다.
하다르~ 몸 조리는 잘 하고 있나요? 산후 조리 하다가 심심해서 인터넷 하나 보군요. ^^ 산후 조리 잘 끝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달 채경자매님 결혼식에서 뵈어요. 그리고 김충만 형제님, 저도 감사드립니다. 형제님의 가정과 교회를 시작으로 희년살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배은진 님. 올려주신 글을 이렇게 뒤늦게서야 봤습니다. ㅠㅠ 죄송~ 희년과 안식년은 거룩한 안식일의 연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주일성수를 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안식년과 희년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희년살기라고 생각됩니다. 안식년과 희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바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권리 그 중에서도 특히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어야한다라고 생각됩니다. 평화!
깊은 묵상을 통한 명쾌한 글이네요.
동감이예요
예수살기가 희년살기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