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즐겨들었던 성경 이야기중의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다. 특히 몇 장의 삽화를 곁들인 얇은 그림책은 등장인물의 표정을 담고 있어 이야기에 극적인 느낌을 더하여 주었다. 나에게 이야기의 절정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그리고 부자는 지옥에서 서로를 대면하는 장면이다. “ 역시, 하나님은 공평해!” 라고 중얼거린 어린 마음에 일었던 시원하고 통쾌한 기분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지금도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이 두 부류는 동일한 땅을 밟고 살고 있지만 정치, 경제, 교육, 행정, 사법, 문화 속을 들여다보면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 이 존재하며, 죽고 난 후에도 ‘큰 구렁’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이 되어 이편저편으로 가른다. 그렇다면 수천년 동안 선지자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하신 희년은 인간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이 간격을 좁히고 메우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영적인 삶에 관한 말씀인가 ?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성령의 충만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회 제도 개혁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인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게 공평과 정의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둘 사이에 화해가 가능한가? 모든 벽을 없애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기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리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루 일상의 중심은 주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로 좁혀지고 현란한 말이나 문장으로 관념의 사치를 즐기지만 이것조차도 기본 조건의 충족이란 가정을 전제로 한다. 대화나 토론의 주제나 내용이 지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매한 주제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픈 배를 움켜잡고 그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자태를 뽐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조차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고상한 유희가 아닌가 생각한다. 행동하는 한 사람이 없는 한 말은 말일 뿐이며 글은 글일 뿐이다. 말과 글이 생각과 뜻을 전하며 마음의 불꽃을 일이키지만 손과 발이 없는 한 아무 것도 아닌 허상일 뿐이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행동하는 한 사람의 시작점이 없는 한 그저 공중에 떠도는 혹은 책속에 파묻혀 있는 죽은 것에 불과하다. 위의 질문에 대해 어떤 이가 하나님의 ‘섭리’, ‘은혜’, ‘주권’, ‘능력’, ‘역사’란 단어들로 해맑게 웃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쉽게 답한다면 나는 그것을 ‘배부른 돼지의 답변’이라 부르겠다. 본회퍼 목사님은 ‘값싼 은혜’를 부르짓는 교회를 향해 경고하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시대의 역사가, 예수 시대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 장바니에 신부님께 물었다.
“신부님, 당신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희년의 법을 땀 흘리며 굵은 마디의 손으로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의 심정으로 너와 내가 함께 삶의 구석진 현장에서 공평과 공의를 선포하기 위해 영광의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치열한 전쟁터에 함께 싸우는 ‘Jubilee Soldier’의 부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또한 당황스러웠다.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이란 고백과 함께.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잠언 16장 3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