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응보적 정의(법을 위반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 거기에 맞는 형벌과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회복적 정의(단순한 처벌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대화와 이해, 회개, 용서, 치유, 화해 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 분배적 정의(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로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분배적 정의는 공로적 정의(개인의 기여나 공로, 노력에 따라 받는 것), 평등적 정의(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존엄성 등에 따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이 세상의 자원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 필요적 정의(인간으로서 필요한 필요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채워주는 것)로 나눌 수 있고, 세 가지 정의 모두 성경적인 근거가 있으며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점도 설명했다.
공로적, 평등적, 필요적 정의를 모두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토지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개인의 공로적 정의를 주장할 수도 없고, 토지 사유제를 통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토지 불로소득으로 누군가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공로적 정의를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공로적 정의를 주장하려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도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토지(노동과 주거의 대상)에 대해서는 평등적 정의를 보장해야 하지만, 이를 넘어서 다른 사람이 노동하여 만든 것에 대해서까지 평등적 정의를 주장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에 대해서까지 평등적 정의를 주장하면서 무엇인가를 무상으로 가질 수 있다면 그만큼 노동한 사람의 자유는 침해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모두 취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노예 사유제다. 토지 사유제는 노동의 대상인 토지를 사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취할 수 있는 제도다. 따라서 토지 사유제는 본질적으로 노예 사유제와 같다. 미국의 사회사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토지 사유제는 사실상 노예 사유제와 같은 것이며 토지가 없으면 진정한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헨리 조지의 통찰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자기 집과 땅이 없는 사람은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거액의 빚을 지고 자신이 노동한 결과를 평생 빚에 대한 이자로 갚으면서 살아야 한다. 이들이 바로 자기 집의 노예가 된 하우스 푸어(house poor)다. 또 집이 없는 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치솟는 주거비 때문에 노동한 결과를 고스란히 임대료로 지급하고 가난해진다. 이들이 바로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다는 워킹 푸어(working poor)다.
최근에는 결혼하면 빚을 지게 되는 허니문 푸어(honeymoon poor), 아이를 낳으면 가난해지는 베이비 푸어(baby poor)도 등장했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 후 빚을 진 가구는 64.4%이며 빚을 지게 된 이유로는 주거지 마련이 79.6%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해진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땅(집)이 없다는 것이다. 연예,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이른바 삼포 세대도 바로 땅(집)이 없는 젊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땅(집)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자유가 없는 노예나 다름없다. 자신이 노동한 결과를 땅(집)을 가진 사람에게 계속 빼앗기면서 가난해지기 때문이다. 즉 토지가 없으면 진정한 자유가 없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필요적 정의를 실행해야 한다. 또한, 어려움에 부닥친 사회적 약자는 대부분 땅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필요적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장 생존에 필요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과 함께 근본적으로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당장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있는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시급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강도질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잘해 왔지만, 강도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자선과 정의는 분리될 수 없고 함께 실행해야 한다.
최근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가 자선으로도 빈곤을 종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서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김동호 목사의 주장은 필요적 정의만으로도 분배적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동호 목사는 '깨끗한' 공로적 정의와 필요적 정의는 강조하지만, 토지에 대한 평등적 정의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 김동호 목사가 강조하는 '깨끗한' 공로적 정의와 필요적 정의를 이루려면 토지에 대한 평등적 정의를 함께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김동호 목사가 몰라서 그런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알면서도 그런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목을 계속 조를 수는 없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도 해야 하지만 그들이 매고 있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사 58:6)" 일도 해야 한다. 고통의 원인을 해결할 수도 있는데 해결은 하지 않고 계속 자선만 베푼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회적 약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지 않고 계속 자선만 베푸는 것은 대증(對症)적인 처방이다. 이는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수술은 하지 않고 진통제만 계속 주는 것과 같다. 토지에 대한 평등적 정의와 노동의 결과에 대한 공로적 정의, 어려움에 부닥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필요적 정의를 함께 실행해야 온전한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요약하면,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노동과 주거의 대상인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평등적 정의)와 각자 노동한 결과를 보장(공로적 정의)한 후에 세상과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의 필요는 국가와 시민사회, 종교계, 개인이 채워 주어야(필요적 정의) 한다는 것이다. 토지에 대한 평등적 정의와 노동의 결과에 대한 공로적 정의, 어려움에 부닥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필요적 정의를 현대에 맞게 이루기 위해서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토지 불로소득을 사회가 거두어 사회를 위해 쓰면 된다.
토지 불로소득을 사회가 거두어 사회를 위해 쓰면 토지에 대한 평등적 정의가 사실상 이루어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또한, 토지 불로소득을 통해 다른 사람이 노동한 결과를 취하면서 공로적 정의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토지 불로소득을 거두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 사회적 약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쓰면 그만큼 노동의 결과를 거두어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공로적 정의를 침해하지도 않고, 토지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평등적 정의를 달성하면서 필요적 정의도 이룰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처럼 토지 사유제를 통해 토지 불로소득을 개인이 취하는 사회에서는 공로적 정의, 평등적 정의, 필요적 정의가 모두 침해받는다. 즉 진정한 분배적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복지국가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하지만 복지국가 논의의 핵심은 "무슨 돈으로 복지를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우선으로 토지 불로소득을 거두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 사회적 약자와 사회복지를 위해 쓴다면 필요적 정의뿐만 아니라 평등적 정의, 공로적 정의도 동시에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논의되고 있는 복지국가의 내용은 결국 토지 불로소득보다는 노동의 결과를 거두어 복지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정의는 효율적이면서도 지속 가능한 것이다. 정의에 바탕을 둔 복지국가가 아니면 효율적이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존 롤즈(John Rawls)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이학사 역간)에서 말한 대로 이론이 아무리 정치(精緻)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